제목 [김미란 칼럼] 아파트 회의 자료 준비하다가 사문서 변조라니
조회수 887 등록일 2021-02-17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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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란 법무법인 산하 변호사

 

관리사무소장 A는 본인이 근무하는 아파트에 동대표 선거가 임박하자 선거관리위원회 회의를 준비하게 됐다. 그런데 회의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에 특이한 문구가 있었다. 투표 방법을 정하면서 ‘선거는 기표 방법에 의한 무기명 비밀투표(모바일 투표는 하지 않는다)로 한다’고 명시돼 있는 것이다.

A는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주택관리법령에 따르면 동대표나 입주자대표회의 임원 선출 등 공동주택 관리와 관련해 입주자 등의 의사 결정이 필요할 때 전자적 방법에 의한 의사 결정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그렇게 전자 투표 방식을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안착화 시킨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 이제 아파트에서 전자 투표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도 않다.

A는 관련 법령에서 이미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전자 투표 방식을 이렇게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으로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회의 자료에 첨부할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을 준비하면서 이를 원본 그대로 인쇄해 첨부하지 않고 수정하기로 했다. 컴퓨터로 위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파일을 연 A는 ‘모바일 투표는 하지 않는다’라는 괄호 속 문구를 임의로 삭제하고, 이와 같이 삭제한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을 인쇄해 회의 자료로 준비했다. 당시 회의에 배포된 위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은 A가 위와 같이 일부 문구를 임의로 삭제한 것이었지만 선거관리위원들은 그와 같은 사정을 알지 못한 채 회의를 진행했다.

A가 무심코 저지른 이 행동은 사문서 변조 및 변조 사문서 행사죄에 해당하는 범죄다. 우리나라 형법은 문서를 위조하거나 변조하는 행위, 이와 같이 위조하거나 변조한 문서를 행사하는 행위 모두를 엄히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231조에 따르면 행사할 목적으로 권리·의무 또는 사실 증명에 관한 타인의 문서 또는 도화를 위조 또는 변조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같이 위·변조된 문서 등을 행사해도 마찬가지다.(형법 제234조)

문제가 된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은 법률관계의 발생·존속·변경·소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표시가 포함된 문서이므로 ‘사문서’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위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가운데 ‘모바일 투표는 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임의로 삭제한 것은 ‘변조’에 해당한다. A는 이렇게 변조한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을 선거관리위원회 회의 자료로 배포해 사용할 목적이었으므로 ‘행사할 목적’ 역시 인정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A는 실제로 위와 같이 준비한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을 선거관리위원회 회의 자료로 배포했다. 결국 A가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중 일부 문구를 삭제하고 이를 회의자료로 배포한 행동은 사문서 변조 및 동행사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A는 이 일이 문제가 돼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결국 기소돼 형사재판정에 피고인으로 서게 되기까지 했다. 물론 형사재판의 결과는 벌금 50만원, 그마저도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니 유죄 판결 가운데 가장 약한 형을 선고받은 것이기는 하다(부산지방법원 2020. 12. 10. 선고 2020고정856 판결 참조).

선고유예란 범죄가 이뤄진 정황이 경미해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특정한 사고 없이 그 기간이 경과하면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형법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자격정지 또는 벌금형을 선고할 경우 개전의 정이 현저하고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받은 전과가 없는 경우에 한해 선고유예를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형법 제59조 제1항). 선고유예를 받은 날부터 2년이 경과하면 면소된 것으로 간주한다(형법 제60조 참조). 선고유예는 형의 집행 없이도 형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서도 해당 기간이 경과하면 유죄 판결이 선고되지 않았던 것과 같은 효력이 부여되니 가장 경미한 유죄 판결이라 할 수 있다.

법원이 A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하면서 덧붙인 양형 사유를 보자면, 초범으로서 전과가 없었던 점, 선거관리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전자적 방법을 통한 의사 결정을 허용하고 있는 공동주택관리법 제22조, 동법 시행령 제22조, 아파트 관리규약의 각 규정 취지대로 전자 투표 방식이 가능하도록 선거관리위원회 규정 내용을 수정해 회의 자료를 배포하려다가 범행에 이르게 된 점, 관리사무소장직에서 해임되는 등 이미 상당한 불이익을 받은 점, 반성하며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점 등이 나열돼 있다.

전과도 없는 초범이면 그간 불미스러운 일로 경찰서나 형사 법정에 드나들 일이 없었다는 뜻이니 A로서는 이 모든 과정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비록 형사재판 결과 가장 가벼운 유죄 판결을 선고 받았다 하더라도 선고유예는 무죄가 아닌 유죄 판결이다. 수사를 받고, 피고인으로 형사재판을 받는 과정이 결코 녹록했을 리 없다. 게다가 결국 직장까지 잃었다지 않은가? A의 입장에서는 무심코 저지른 일의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별생각 없이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에서 문장 하나 지웠을 뿐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와 같은 행동은 엄연한 범죄다. A가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에서 ‘모바일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임의로 삭제한 것이 공동주택관리법령상 전자적 방법에 의한 의사결정을 허용하고 있다는 취지에 부합하더라도 함부로 사문서를 변조하고 이를 행사한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만일 모바일 투표 등 전자투표 방식을 허용하고자 했다면 관리사무소장이 문제 된 규정을 함부로 삭제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거관리위원회 규정을 개정했어야 한다.

 

관리사무소장은 공동주택에서 일어나는 각종 영역의 다양한 업무를 처리한다. 그 업무처리 과정에 위법함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로도 수사를 받고 형사재판까지 받게 된다. 선고유예면 유죄 판결 중 가장 약한 형벌이지만 관리사무소장이 겪었을 그간의 고초가 떠올라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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